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다안의 침입 (문단 편집) === [[충렬왕]]의 무책임한 태도 === 이렇게 [[고려]] 내부에서 맹장 원충갑이 격렬하게 분전을 펼치는 동안, 당시 왕세자였던 훗날의 [[충선왕]](忠宣王) 왕원은 원나라에 머물고 있었다. 명민했던 세자 왕원은 2월경 장군 오인영(吳仁永)을 외할아버지 [[쿠빌라이 칸]]에게 보내 [[고려]]의 어려운 사정을 알리도록 했는데, 카다안의 반란군이 부마('''쿠르겐''')국인 고려의 북계(北界)를 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노년의 [[쿠빌라이 칸]]은 황당해하며 물었다. >'''"[[당태종|당 태종]]도 [[고구려]]에게 패했고,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,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?"''' 그러자 오인영은 >'''"그때는 그때일 뿐 지금의 고려는 다르다."''' 라고 대답해야만 했다.[* 정작 카다안의 반란군에게 맞서야 할 고려군을 해체시켜 원나라의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든 장본인이 쿠빌라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뻔뻔한 발언이었지만, 그렇다고 대몽골 울루스의 대칸이자 대원제국의 황제였던 쿠빌라이를 대놓고 디스할 수는 없었으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.] [[쿠빌라이 칸]]은 >"카다안을 무찌르기 위해선 밤중에 전투를 치러야 한다" 고 충고했다. 또 외손자인 세자 왕원의 지원 요청에 대해서는, 나이만다이에게 10,000명의 병사를 보내 지원하도록 했다.[* 조선 후기 정동유의 《주영편》에 따르면 이때 세조 쿠빌라이가 외손자인 세자 왕원(충선왕)에게 야간 전투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.] 3월 20일, [[충렬왕]]은 대장군 송화(宋華)를 보내 송분이 버리고 달아난 수도 [[개경]]을 지키도록 했는데, 이미 그 주변에도 카다안의 무리들이 약간씩 어슬렁거리고 있어 소규모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. 여하간 왕도 달아난 난장판의 상황이라 이천(利川) 사람 신비(申費)는 카다안의 간첩과 공모했고, 용강(龍岡) 사람 김철(金哲)은 적에게 투항해 [[개경]]으로 가는 길잡이 노릇을 해주었으므로 그들을 잡아 저자에서 목을 베는 일도 있었다. 4월 6일, 원주산성 방호별감(原州山城防護別監)이었던 복규가 카다안군 포로 58명을 [[충렬왕]]에게 바쳤는데, 이는 격렬했던 '''치악성 전투'''에서 사로잡은 병사들인 듯 싶다. 며칠 뒤인 4월 17일, '''마침내 기다리던 [[원나라]] 지원군이 도착했다.''' 마음이 든든해진 충렬왕은 원나라 장수들에게 연회를 베풀며 놀자판을 벌였다. 헌데 이것이 못마땅했던 지원군의 사령관 세도칸이 >'''"지금 [[쌀]]도 없는데 이렇게 놀다가 적하고 싸울 때 군량미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인가?"''' 라고 따져 물었다. 이후 세도칸은 옆에 앉아 있던 홍자번에게 >'''"네가 정승이니 국가 재정의 일은 잘 알고 있을 테고, 마땅히 군대에 군량을 잘 지급해야 할 것이다!"''' 라고 일갈을 했다. 이렇게 되니 연회 자리는 축하는커녕 분위기가 냉랭해졌고, 무안해진 충렬왕은 >"내고에 비축해 둔 것이 있으니 필요하면 지급할 수 있을 거요." 하고 대충 둘러대야 했다. 또 며칠 뒤인 4월 21일에 [[충렬왕]]은 [[개경]] 부근에서 또다른 지원군을 이끌고 온 나이만다이를 위로하는 잔치를 다시 벌였다. 헌데 여기서 나이만다이는 >'''"적이 쳐들어왔는데 왕께서 친히 적을 막으시는 게 어떻겠느냐."''' 고 물었고, 이에 충렬왕은 >'''"나는 너무 늙고 병들어서 곤란하다."''' 고 대답했다. 그러자 [[고려]]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나이만다이조차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는지, >'''"적이 나라 안까지 쳐들어왔으면 명색이 왕인 사람이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, 늙고 병들었다고 혼자만 손가락 빨고 있으면 되겠느냐."''' 며 엄청나게 강경한 언사로 훈계를 퍼부었지만 [[충렬왕]]은 못들은 척했다.(…) 그 다음 날, 나이만다이는 사람을 보내 충렬왕에게 말을 전했는데, >"어제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건 기쁘지만, '''적을 막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돌아가버렸으니 도와주러 온 우리는 정말 당혹스럽다. 이웃집에 불이 나도 기꺼이 달려가 도와주는 법인데, 하물며 자기 집 일인데 왜 가만히 있느냐."''' 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(…). 이와 더불어 쿠빌라이 칸의 막내 딸이었던 왕비 [[제국대장공주|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]]에게 말 안장을 하나 바쳤다. 충렬왕이 이런 상황을 방임한 것은 내심 원나라에 대한 반발이 컸고, 침입한 카다안 반란군을 이용해 원나라의 내부 분열을 부추기려고 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. 게다가 중앙군말고는 군대라고 할 만한 전력도 없고, 일반 백성들을 모아 조직한 군대는 전투력에 한계가 명백한 만큼[* 조선시대 의병 조직을 생각하기 쉽지만 의병들은 당시만 해도 건재했던 조선군의 징병제에 의거하여 엄연히 정규군에 교대로 입대했다가 돌아와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. 즉 어느 정도는 전투라는 걸 할 줄은 알았다는 점에서 이 시점에 이르면 아예 군문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 대다수가 된 고려 백성들과는 전혀 달랐다.] 애초에 카다안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. 다만 추측대로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치더더라도 나이만다이가 말했듯이 자기 백성과 국토를 유린받도록 방치한 것은 사실이니 충렬왕의 언행은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